[영화평 300]흙탕물로 뛰어든 배트맨
[영화평 300]흙탕물로 뛰어든 배트맨
  • 뉴시스
  • 승인 2022.03.0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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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빈 기자 = 3월 1주차 개봉 영화 및 최신 영화에 대한 간단평을 300자 분량으로 정리했다.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영웅이 되다…더 배트맨

시종일관 어둡고 축축하다. 창백하게 질려있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더 배트맨'은 그림자의 영화다. 그리고 복수의 영화다. '더 배트맨'은 아마도 지금껏 나온 배트맨 영화 중 가장 우울한 작품일 것이다. 마블 슈퍼히어로 영화의 경쾌함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실과 좌절이 안긴 깊은 트라우마에서 탄생한 이 자경단이 어떻게 행복한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겠나.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잘 잊히지 않을 이미지를 선사함과 동시에 그 이미지로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린 이제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저 악당을 해치우는 배트맨이 아니라 절망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 세계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싸우는 남자를 알게 됐다.
 


◆몰락의 기쁨…나이트메어 앨리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파괴된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몰락에 매혹된 남자의 이야기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욕망에 파묻힌 것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나락으로 떨어지기 위해 산화한 것에 관한 얘기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급전직하 하는 비극적 삶이라는 건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니 어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나. 그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다. 괴물도 유령도 없다. 크리처물도 공포물도 아니다. 그의 영화를 두고 흔히 표현하는 동화 같은 얘기는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트메어 앨리'는 델 토로의 영화다. 어둡고 음침하고 불길한데, 이토록 화려하고 매혹적이니까. 추하면서도 아름답고, 비통하면서 기쁘기까지 하다.
 

◆이 죽일 놈의 사랑…시라노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어쩐지 오글거리는 이 질문을 뮤지컬 영화 '시라노'는 웃음기 싹 빼고 진지하게 묻는다. 시라노(피터 딘클리지)는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를 가졌지만, 비루한 외모도 함께 가졌다. 크리스티앙(켈빈 해리슨 주니어)은 첫눈에 반할 외모를 가졌지만, 사랑의 언어를 갖진 못했다. 그리고 우리의 록산(헤일리 베넷)은 시라노의 말과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동시에 사랑한다. 그럼 록산이 사랑하는 건 누구란 말인가. 시라노는 록산이 사랑하는 건 크리스티앙이라고, 크리스티앙은 록산이 시라노를 사랑하는 거라고 말한다. 영화 '시라노'는 이 비극적 삼각관계를 아름답고 위엄있는 노래들로 풍성하게 채워넣으며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육체는 없는 영혼, 영혼 없는 육체. 무엇을 사랑하겠나.
 

◆니콜라스 케이지, 아직 안 죽었다…피그

롭이라는 남자가 누군가 훔쳐간 자신의 돼지를 찾아나서는 얘기가 '피그'다. 이게 영화가 되는 거냐고? 롭을 연기하는 게 니콜라스 케이지라면 가능하다. '피그'에서 돼지는 돼지 따위 가축이 아니라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어떤 것이다. 그런데 그걸 잃어버렸다면, 롭처럼 모든 걸 바쳐서라고 그 돼지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명배우이지만, 어느새 한물 간 스타가 돼버린 케이지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듯한 영화이기도 하다. 롭이 돼지를 찾듯 케이지는 배우로서 명성을 되찾고 싶어하는 것만 같으니까. 어찌됐든 케이지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잘못된 사랑…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당신의 사랑을 점검하게 한다. 당신의 사랑이 사실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는 불행을 인정할 수 없어 애써 그 관계를 사랑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이를 깨달은 에드워드는 29년을 함께 산 아내 그레이스의 곁을 미련 없이 떠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레이스는 '우린 사랑할 수 있다'고 맞선다. 아네트 베닝과 빌 나이의 명연기를 맛볼 수 있는 영화다. 영국의 젊은 배우 중 최근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조쉬 오코너가 두 사람의 아들 제이미로 출연하다.
 

◆그들만의 PTA, 그래도 PTA…리코리쉬 피자

폴 토머스 앤더슨은 영화 마니아들이 사랑하는 감독이다. 이 말은 아무리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에다가 밝고 유머러스해도 진입 장벽이 있다는 얘기다. 물론 워낙 만듦새가 좋다보니 재밌게 볼 수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꾸준히 봐온 관객이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각종 레퍼런스 탓에 평범한 관객이 마음 놓고 즐기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영화를 잘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의 세계를 편견 없이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눈치를 봐서야…모럴센스

이 영화는 이중적이다. 당당한 척하면서 움츠려들고, 과감하게 내딛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꾸만 제자리에서 머문다. 산뜻하고 도발적으로 출발하고나서도 진부한 길을 간다. 말하자면, '모럴센스'는 뻔한 로맨틱코미디를 거부하면서 그저 그런 로맨틱코미디를 답습한다. BDSM이 도대체 왜 불편하냐고 외쳐놓고 BDSM을 불편해할지도 모를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서둘러 수습한다. 그나마 이 영화를 빛내는 건 주연 배우인 서현과 이준영의 새로운 얼굴이다.
 

◆침묵의 걸작…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는 현재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일본 감독이다. 그는 올해 '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현재 일본 영화계 최전선에 있는 예술가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번에 개봉하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챙겨봐야 한다. 이 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기만 하다. 하지만 러닝 타임 3시간을 다 견디고 나면 눈으로 보지 못한 화염을 분명 느낄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마구치는 오래 전 딸을 잃고 이젠 아내마저 떠나보낸 한 남자의 침묵 속에서 그 길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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