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화림도 있었다…거사를 도운 그녀
그리고 이화림도 있었다…거사를 도운 그녀
  • 뉴시스
  • 승인 2019.02.27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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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조직한 한인애국단 핵심 멤버
이봉창·윤봉길 거사 조력 역할 해내
김구 직접 찾아가 의열 투쟁에 투신
1919년 15살 나이에 3·1운동 참여해
한인애국단 시절 김구(가운데)과 이화림(왼쪽).
한인애국단 시절 김구(가운데)과 이화림(왼쪽).

1932년 4월28일. 말쑥하게 차려입은 두 남녀가 중국 상해 홍커우 공원에 나타났다. 평범한 젊은 부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공원 주변을 맴돌았다. 그들은 산책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시각 홍커우 공원에선 일본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일제의 중국 본토 침략과 승리를 기념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축하하는 행사가 준비 중이었다. 경비는 삼엄했다. 두 남녀는 한동안 공원 여기저기를 둘러보더니 이내 사라졌다.

4월29일 행사 당일. 전날 보였던 그 남녀가 또 한 번 홍커우 공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원 앞까지 함께 온 두 사람은 이번엔 따로 움직였다. 남자는 행사장 깊숙이 들어간 반면 여자는 행사장 주변에서 남자의 움직임을 초조한 눈빛으로 살폈다. 

축하 행사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상 주변에서 굉음이 퍼져나갔고 행사는 아수라장이 됐다. 일본군 수뇌부 수십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던 그 남자는 곧장 체포됐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공원을 빠져나왔다.

"그때 윤봉길이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일본놈들이 마치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지."(강영심, '이화림, 조선의용대 여성 대원')

세월이 흘러 어느새 노인이 된 여자는 1932년 4월29일 그때를 이렇게 기억하며 웃었다. 

폭탄을 던진 '남자'가 바로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멤버 윤봉길(1908~1932), 윤봉길과 함께 홍커우 공원을 정찰하고 거사(巨事)를 지켜본 '여자'가 같은 조직의 이화림(1905~1999)이었다. 

이화림은 사실 윤봉길과 거사를 함께 치르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김구가 말렸다. 김구는 일본어가 서툰 이화림이 자칫 일본군의 검문에 걸리기라도 하면 거사가 완전히 실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고 김구를 찾은 이화림은 그렇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화림은 같은 해 1월8일에 있었던 '작업'에도 참여했다.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거사인 히로히토 천황 제거 작전이었다. 이봉창(1901~1932)이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실패했다. 불발이었다. 이때 이봉창이 폭탄을 숨기고 천황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도운 게 이화림이었다. 

가랑이 사이에 주머니를 만들어 폭탄을 숨기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직접 주머니를 만든 게 바로 그였다. 이후 이어진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투탄'은 한인애국단의 두 번째 작업. 그러니까 이화림은 독립운동 역사에 남을 두 차례 사건 바로 뒤에 있었던 셈이다. 한인애국단의 핵심 3인방은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이화림이었던 것이다. 

거사를 앞두고 태극기 앞에서 선서를 하는 이봉창(왼쪽)과 윤봉길(오른쪽).
거사를 앞두고 태극기 앞에서 선서를 하는 이봉창(왼쪽)과 윤봉길(오른쪽).

아무리 조력자였다고 해도 윤봉길과 이봉창은 알아도 여성 독립운동가 이화림에 관해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상황을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은 이같이 설명한다.

"이화림은 사회주의자였다. 1935년부터는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등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44년 이후에는 의사(醫師)로 종공군 측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는 북한으로 건너갔고, 이후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 평생을 살았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이뤄지면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나서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이화림이 사회주의자였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조국을 너무나 사랑해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겨우 15살의 나이에 3·1운동에 참여했다. 학교의 리더로 다른 학생들을 3·1운동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면서도 항일지하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것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함이었다. 

1931년 27살의 이화림은 '의열 투쟁'에 뜻을 품고 김구를 찾았다. 그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있었다. 또 다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두봉(1989~1960)이 써준 추천사였다. 김구는 김두봉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과 사상은 다르지만 독립운동에 헌신적인 인물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김구가 이화림을 순순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여성인데다가 사상도 다른 그를 김구는 탐탁치 않아 했다. 하지만 이화림의 짧게 자른 머리와 강렬한 눈빛에 김구도 그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화림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를 함께했다.

강영심 전 이화여대 교수는 이화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혁명 이론가도, 민족해방운동의 핵심 인물도 아니었다. 평양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름 없는 학교에서 단기간 교육받은 게 학력의 전부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어떤 남자 못지 않은 나라 사랑의 마음을 조선혁명 전선에서 불태운 열성적인 여성이었다.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자 사상적인 무장은 물론 신체 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여성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독립, 조선 혁명을 위해 투신한 여성 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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