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마타하리 가와시마
동양의 마타하리 가와시마
  • 김영수 객원기자
  • 승인 2019.04.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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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마타하리'로 불리는 가와시마는 뛰어난 스파이 활동과 이중 간첩의 이력이 있다. 본명이 진비후이인 그녀는 1907년 청나라 황실 숙친왕의 열네 번째 딸로 태어났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황실이 몰락하자 숙친왕은 일본의 보호 아래 황실 복원 운동을 추진하며 진비후이를 일본으로 보냈다. 그녀는 일본에서 가와시마 요시코라는 이름을 얻었다.

가와시마 요시코
가와시마 요시코

당시 가와시마는 '남장 여자'로 유명했다. 그녀가 18세 되던 해 숙친왕이 사망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남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 상하이로 건너와 다나카 류키치라는 무관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스파이 활동에 뛰어들었는데, 일본어·중국어·영어·만주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데다 '청나라 공주'라는 상징성과 빼어난 외모를 무기로 청나라의 고급 정보를 빼갔다.

1여년의 강도 높은 훈련 이후 1931년 11월 가와시마는 첫 임무를 받는다.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을 텐진에서 뤼순으로 빼돌리라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일본은 소위 '유조호 사건'을 일으켜 만주사변을 촉발했고, 텐진에 머물고 있던 청나라 황제 부의를 뤼순으로 탈출시키는 공작을 실행하고 있었다.

가와시마는 2만 엔으로 중국인 노동자를 매수, 상하이에 머물던 일본인 승려를 공격하게 했다. 이 일로 승려 한 명이 살해됐는데, 이를 빌미로 일본인이 집단 폭동을 일으킨다. 중국 경찰이 나섰지만 또 다른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결국 중일 간 군사적 충돌인 '1.28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 확대됐다. 이를 전후해 가와시마는 중국군의 기밀과 동향, 군 배치 현황 등의 주요 정보를 캐내 일본의 승리를 견인했다. 이렇게 걸림돌을 제거한 일본은 만주국 건국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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