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 반전…인화지 아닌 카펫 위에 황홀경
독일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 반전…인화지 아닌 카펫 위에 황홀경
  • 뉴시스
  • 승인 2024.02.2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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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렉탈 패턴 290cm 카펫에 출력 장엄한 아름다움
한국서 20년만 전시…PKM갤러서 3월13일까지
Thomas Ruff, d.o.pe.10, 2022. 사진=PKM갤러리 제공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것은 사진이 아니다."

독일 사진 거장으로 꼽히는 토마스 루프가 아시아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신작 'd.o.pe'에 대해 "사진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카메라도 관여 되지 않았고 사진이 존재하지 않는다. 갖가지 테크닉을 탐구하는 연구의 일환이다."

21일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만난 그는 사진계의 혁신가로 보였다. 한국에서 20년 만에 여는 전시는 디지털의 진화와 함께 최선봉에 선 '이미지 작업의 끝판'이다. 

그동안 자화상에서 과학, 추상, 비사진으로 이어온 자신의 작업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작업은 '프랙털(fractal)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패턴"이라며 "존재하는 이미지를 새로운 작업으로 바꾼 작업"이라고 했다.

실제로 PKM갤러리에 전시한 작품은 사진 작가의 작품이라는 개념을 깬다. 인화지가 아닌 카펫에 프린트해 섬세하고 정교하고 치밀한 테피스트리(tapestry)같기도 하다.

작품은 일단 아름답다. 최장 290cm의 거대한 융단위에 펼쳐진 황홀경으로 눈을 홀린다. 카펫이냐 작품이냐는 의문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디테일한 비주얼의 장엄한 압도감에 빠지게 한다.

마치 피부처럼 염색 된 작품이지만 'AI 알고리즘'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루프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이번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면서 "2000년대 초반 프랙털 구조의 다차원적인 아름다움을 작업에 반영하고자 했으나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했고, 20년이 지난 시점인 2022년에 소프트웨어의 발전과 더불어 비로소 실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PKM갤러리 토마스 루프 개인전 전시 전경

사진예술이 테크놀로지와 불가분리한 관계임을 인정하는 그는 이번 신작 'd.o.pe.'에서 신기술에 말 그대로 ‘뛰어들어(dive into) 환상적인 이미지를 추출하고 이를 부드러운 직물 위에 심도 깊게 투사해냈다.  신작 제목은 영국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1894-1963의 '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 1954)에서 따왔다.

카펫에 작업한 이유는 단순했다. 프렉탈에서 패턴을 생성하고 나서 작은 인화물로 출력해 몇 주 동안 살펴봤다. 이미지에 만족했을때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이 생겼다.

"인화지에 인화를 해 벽에 핀으로 붙여 놓고 보았더니 '뭔가 잘못 되었다'고 느꼈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대형 출력하는 전형적인 방식도 괜찮겠지만 정확하게 그건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21일 독일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 작가가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개하는 신작 사진 시리즈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미 캔버스 천에도 출력해봤으니 여러가지 직물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이미지는 회화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서 "아름답게 출력하려면 새틴 천으로 해볼까 했는데 크기에 제약이 있었다"며 수없이 고민해 결국은 카펫에 출력한 배경을 설명했다.

"한참을 궁리하다 벽에 카펫을 걸어 놓는 전통이 있는 벨기에에 있는 한 회사에서 벨로어 카펫에 이미지를 출력한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미지를 보내 카펫 회사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했다. 회화가 아니고 사진도 아니지만 태생이 사진 작가여서 인지 작품 당 에디션은 4개를 뽑았다.

루프는 "인화지는 디테일은 더 정확하지만 카펫은 완전히 다른 깊이감을 보여준다"면서 "인화지는 평평한 표면에 인쇄된 것과 같은 느낌이고 카펫은 이상한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환상적인 이미지를 추출해낸 배경은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친 청춘의 시기와 맞물려있다. 1970년대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가 기하학적인 프렉탈을 이야기해서 유명해졌는데 그 당시 미국에서는 히피 반문화 운동이 거셌던 시대였다.

그 세대 속하던 많은 사람들이 약물에 취해서 핑크플로이나 도어스 음악을 들으면서 환상에 젖어 들고 했는데, 그도 그런 문화의 일부로 그 당시를 보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 사이킥델릭한 이미지가 있는 LP커버를 보면서 음악을 들었고 이런 이미지에 항상 매혹을 느꼈다."

카펫에 나온 화면은 잎사귀, 깃털, 조개껍질 등 주변의 익숙한 자연 형상으로 읽히는 동시에 사이키델릭한 가상 공간으로 빠져들게 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세한 세포를, 광활한 우주의 예측 불가능한 현상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 만들어진 실제의 모호한 경계에서 사진의 경지를 다시 개척한 루프의 이번 신작은 '인식의 문' 너머, 시각적인 초월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전시는 3월13일까지.

◆독일 사진 거장 토마스 루프는?
1958년 생 토마스 루프는 현재 뒤셀도르프에서 거주 및 활동 중이다. 독일 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에서 베른트 베허Bernd Becher, 1931~2007에게 사진을 사사한 후, 1980년대부터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1955-, 칸디다 회퍼 Candida Höfer, 1944- 등과 함께 뒤셀도르프 사진학파의 주요 멤버로서 세계 사진계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기술과 개념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이에 도전하며, 국제 무대에서 그만의 독보적인 시각언어를 구축해 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기술이 이행하고, 사진이 현실을 포착할 뿐 아니라 비가시적인 세계를 보이게 하는 매체로 전환되는 시대를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잠재력과 한계를 가진 채 어떻게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키는지 탐색해왔다.

루프가 1970년대 후반부터 발표한 사진 시리즈는 고전적인 초상사진에서 인터넷에 떠도는 데이터를 수집·편집한 이미지, 인공위성 또는 매스 미디어에서 전송받은 형상, 알고리즘으로 생성한 디지털 작업에 이르기까지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25종류가 넘는다. 그의 방대한 40여 년 작품세계가 20~21세기 현대 사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의 대표작가로 참여한 바 있다. 뉴욕현대미술관, 런던 국립초상화박물관, 뒤셀도르프 K20,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타이중 국립대만미술관 등의 저명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런던 테이트 모던,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 바젤현대미술관 등에서 그룹전에 참가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워싱턴 D.C. 허쉬혼미술관, 파리 조르주 퐁피두센터 등을 포함한 전세계 유수 미술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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