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구토 반복' 섭식장애 4년새 50%↑…"개인문제 아냐"
'폭식·구토 반복' 섭식장애 4년새 50%↑…"개인문제 아냐"
  • 뉴시스
  • 승인 2024.03.10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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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억제제 처방 병원 문전성시
지난 5년 섭식장애 환자5만213명…매년↑
"삶의 주도권이 내가 아닌 음식"
"미국은 치료에 84조원 지원"
우지은 수습기자 = 섭식장애를 앓은 사람들은 다이어트 약이나 보조제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현실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사진은 지난 2일 서울 구로구의 한 의원 앞에 사람들이 다이어트 약을 처방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 

우지은 수습 기자 = "어제 밤 10시부터 와서 기다렸어요." 맨 앞에 헤드셋을 끼고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던 20대 여성 A씨의 말이다. 그는 친구와 함께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 졸고 있었다.

오전 5시18분께 작은 전등 3개만이 비추는 어두운 복도에는 돗자리를 깔고 새우잠을 자는 여성 등 8명이 동이 트길 기다렸다. 대기표를 나눠주는 오전 8시가 되자 사람은 39명으로 늘었다. 오전 10시 문을 열기까지 60여명이 줄을 섰다.

뉴시스는 지난 2일 서울 구로구의 한 의원을 찾았다. 다이어트약을 처방하기로 유명한 이 의원 앞은 백화점 오픈런을 방불케 했다. 다른 병·의원보다 쉽게 대량의 다이어트약을 처방해주기로 이름이 났기 때문이다.

서울 구로경찰서에 따르면 원장은 지난해 11월 마약류 관리법 위반 혐의로 입건돼 조사받고 있다. 원장이 과다 처방한 펜디메트라진은 식욕 감퇴제로 사용되는데 남용 위험이 있어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분류된다. 그럼에도 의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날 의원에서 처방전을 들고나오는 한 환자를 따라갔다. 그는 약국에서 다이어트약을 2달 치 처방받았고 3개월 할부로 결제했다. 약사는 "둘째 달 약이 더 세니 첫째 달 약을 먼저 먹고 그 다음에 먹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섭식장애를 앓은 사람들은 다이어트약이나 보조제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했다. 섭식장애란 정신적 문제로 음식을 먹는 데 장애가 생기는 질환으로, 거식증과 폭식증 등이 이에 해당한다.

권모(31)씨는 섭식장애로 힘들어하는 사람들 위로하기 위해 섭식장애 웹툰을 그려 인스타그램에 연재하고 있다.

6년간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신경성 폭식증을 겪었다는 권모(31)씨는 "어떤 병원에선 정말 쉽게 약을 받을 수 있었고 이 정도는 문제 되지 않는 것처럼 설명했다"며 "부작용이 걱정돼 약을 먹지 않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약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권씨의 섭식장애는 다이어트에서 시작돼 어머니와의 관계로 인해 지속됐다.

권씨의 체질량지수(BMI)는 표준 체중이었지만 보기에는 늘 통통한 체형이었다. 권씨는 초등학교 저학년, 어쩌면 그 이전부터 살을 빼야 하는 사람으로 비춰졌다고 했다. 2017년 본격적으로 운동과 식단 조절을 병행하며 강박이 심해졌다. 먹고 토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증상은 완벽한 모습을 바라는 어머니 영향으로 심해졌다. 권씨는 "엄마는 제가 남들보다 뛰어나길, 좋은 학교와 직장을 다니길, 예쁘고 애교 있길, 싹싹하고 붙임성 있길, 성공해서 보답하길, 완벽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권씨는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할 수 없었다. 음식을 배에 가득 밀어 넣고 있을 땐 그런 불안과 두려움, 자괴감이 잠시 잊혔다. 그리고 배 속을 다시 비워냈다.

권씨는 "내 삶의 주도권이 내가 아닌 음식에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모델로 일하는 안나영(24)씨는 "섭식장애라고 인지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시작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직업 특성상 체중을 감량해야 했던 안씨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체중에 관한 정보를 찾아봤다. 그 후 '다이어트 중 절대 먹으면 안 되는 음식' '알고 보니 고칼로리 음식' 등 콘텐츠가 눈 앞에 펼쳐졌다.

안씨는 "미디어에 나오는 극단적인 양상의 거식증이나 폭식증은 아니어서 인지하지 못하다가 문득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배부르게 먹었다고 느낀 날, 안씨는 권장량의 3배가 되는 다이어트 보조제를 한꺼번에 삼켰다. 과하게 길어진 공복으로 저혈당 쇼크가 온 날도 있었다.

안씨는 "섭식장애라고 하면 심각한 수준의 신체나 습관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음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불안정한 식사행동도 섭식장애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우울증과 소화 불량이 섭식장애로 이어진 사례도 있었다. 박지니(44)씨는 조산아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가정환경 영향으로 우울증도 앓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변비가 생기면서 음식을 먹지 않게 됐다. 그래야 속이 편했다.

박씨는 "장이 안 좋으니까 밥을 안 먹었다. 대학생 땐 식사 습관이 무너져 먹지 않거나 먹고 토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25년 동안 섭식장애를 앓았고 지금은 증상과 타협하며 산다는 박씨는 "예전에는 젊은 여성이 대부분 섭식장애를 앓았지만 지금은 남성도, 10세 아이도 섭식장애를 앓는다"며 "약자들만 겪었던 게 결국 뉴노멀이 됐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일 육아 프로그램 '요즘 육아-금쪽같은 내 새끼'에는 음식을 씹고 뱉고 먹고 토하는 12세 초등학생의 사연이 방송됐다.

거식증, 폭식증 등 섭식장애를 앓는 환자 수는 매년 늘고 있다.

2023년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2018년~2022년) 섭식장애로 진료받은 인원은 5만213명이다. 2018년 8321명에서 2022년 1만2477명으로 약 두 배(49.9%) 증가했다.

여성은 2018년 6714명에서 2022년 1만126명으로 50.9%, 남성은 2018년 1607명에서 2022년 2351명으로 46.3% 늘었다.

섭식장애라고 인지해 진료받은 환자만 통계에 포함됐음을 감안하면 실제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국가의 금전적 지원과 사회의 인식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섭식장애를 개인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율리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섭식장애는 10대·20대에 주로 발생해 청소년과 젊은이의 건강과 삶을 황폐화시킨다. 이는 개인에게 고통과 좌절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큰 손실인데 제대로 된 유병률 조사와 치료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은 국가 차원에서 섭식장애를 관리한다. 김 교수는 "미국은 연간 약 647억 달러(한화 약 84조원)를 섭식장애 부담 비용으로 지원한다"고 말했다. 파킨슨병으로 지출하는 연간 538억 달러보다 많다.

이어 "영국은 섭식장애를 사회·국가적 건강위협요소로 인식해 2015년~2020년 2590억원을 투입했다"며 "조기 치료를 통해 회복률을 높여 의료비용을 절감했다"고 덧붙였다.

날씬한 몸을 강조하는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도 필요하다. 이민아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름다움에 대한 획일화된 시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섭식장애는 여러 경험이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몸매를 관리하다가 섭식장애에 걸렸다고 가정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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