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 건물 운영 둘러싼 갈등 심화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 건물 운영 둘러싼 갈등 심화
  • 김윤희 기자
  • 승인 2022.03.26 0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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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에서 아이돌 블랙핑크 노래가 흘러나왔다. 진원지는 '백화점 철수상품 긴급 정리' 매장. 길 앞으로 나온 매대를 보니 양말, 덧신, 스포츠 양말이 한 묶음에 5천 원, 만 원 했다. 가게 안에선 가방, 등산복, 지갑, 기능성 건강식품 등 잡다한 물건을 최대 80% 할인 판매했다. "사이즈가 몇 개 없어서 싸게 파는 거예요. 환불은 안 되고 교환만 됩니다." 점원이 귀띔했다.

한 달여 전만 해도 이곳엔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 전시가 있었다. 최근 코트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글, 사진, 영상 등으로 표현됐다. 인사동 복합문화공간 코트(KOTE)는 예술인들의 공유 작업실, 전시 및 공연 공간이자 농부시장, 강연 등 시민 행사가 활발했던 곳이다. 장소 가치가 높아지며 광고나 방송 촬영 세트장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코트 본관 2층과 별관은 예술인 작업 공간인 코트랩과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해당 건물은 지난해 12월 사망한 김문기 상지대 전 총장 소유로, ㈜CAAMC 최경순 대표가 10년 임차 계약을 맺은 곳이다. 부동산 임대사업을 하는 최 대표는 2019년 가을부터 ㈜줄라이파트너스 안주영 대표와 확약서를 쓰고 임차 대행권 및 운영권을 줬다. '코트'라는 이름은 안 대표가 '경계의 뜰에 핀 꽃'이라는 의미로 지었다. 코로나19로 인사동 상권이 어려웠을 무렵 예술인들이 코트에서 '꽃'을 피웠지만, 건물 매각 전망과 함께 임차권 분쟁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2년 반 동안 코트에서 저렴하게 공간을 대관하고, 창작 활동을 해온 예술인들은 이곳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최 대표 측이 코트 별관을 주차장으로 만들겠다며 철거를 시작했을 때부터 건물 안에서 텐트를 치고 문화제를 여는 등 연대 활동을 벌여왔다.

"자존감이 무너지는 일이죠. 예술가들이 하나의 공간을 키워내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돈 때문에 다 무시하고 '땡처리' 물건을 놔두는 상황이…" 안무가 김남식씨의 말이다. 그는 지난해 코트의 공유 공간에 입주해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진작가 성남훈씨와 코트 구석구석에서 춤을 추며 사진 작업을 하기도 했다.

코트에는 미술가, 산업 디자이너,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코트에서는 그냥 앉아있기만 해도 다양한 예술가를 만나고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이전에는 누구든 환영받아 '우리'와 '그들'이라는 경계가 없었는데 이제 생긴 것 같네요."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인 백토담(Todd Holoubek)씨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디자이너 칼슨 홍도 코트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코트의 정체성이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분야 사람들이 있다보니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창의성이 요구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겐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너무 좋은 공간이 아닌가 했어요."

수제 꽃 작가 한선우씨는 코트에서 실제 예술가들의 '우연한' 협업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나가다 다른 아티스트가 작품을 보고 자기랑 뭔가 해보지 않겠느냐고 말 거는 식인 거죠. 조형 미술이 음악 등 다른 매체와 어우러지니까 확장성이 생기고 새로운 효과를 내는 거예요."

이처럼 예술인들이 마음 놓고 코트에서 작업할 수 있던 데에는 안 대표의 노력이 컸다.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 권이은정 대표는 안 대표가 공연 취지에 동의하고 예술인을 존중해줬기에 코트에서의 공연이 잘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엄청 비싼 곳인데 사정을 알고 대관료를 거의 안 받았어요. 현재 상황이 이권 싸움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안 대표가 정말로 이익을 밝히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들이 그렇게 발 벗고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다큐멘터리 감독 김혜진씨도 안 대표의 코트 운영 방식이 특별했다고 전했다. "지자체나 국가의 지원을 받는 다른 문화 공간들은 제도화된 측면이 있어요. 제도에 따라 의사결정이 이뤄지죠. 그렇지 않은 민간 공간은 상당히 상업화돼 있는데 코트는 제도화되고 상업화되지 않은 공간으로서 전례 없는 곳이었어요."

혜진씨와 남편 닐스 부비에 감독은 코트에서 벌어진 폭력과 그에 저항하는 예술가, 외국인 커뮤니티의 연대에 관한 장편 다큐멘터리 "경계 속에 핀 꽃"을 만들고 있다. 이들은 작년 11월 포크레인이 별관을 부술 때부터 예술인들 20여 명을 인터뷰했다. '대체 무엇을 봤기에 그 많은 사람이 추위를 무릅쓰고 공간을 지키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현재 코트랩 입주자는 40여 명에서 20명으로 줄어든 상태다. 건물을 둘러싼 갈등으로 상당수 예술가가 떠나긴 했지만 새로 입주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깨어진 틈 사이로 꽃이 피다'라는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프로그램 설명에는 "공간을 지켜준 이들에게 보답하는 뜻에서 공간을 개방해 예술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다양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자 한다"고 돼 있다.

안 대표 측은 1월 11일 서울중앙지법 영업방해금지가처분 소송에서 1심 승소했다. 안 대표는 법원이 '최경순 대표가 안주영 대표의 임차 대행권에 따른 권리행사를 방해하지 말 것을 결정했다'며 최 대표 측이 불법 영업 방해를 지속하고 있다고 말한다. "용역 직원들의 건물 내 농성, 낙서, 출입 저지 등이 다 법원에서 금지됐는데 최 대표 측이 어기고 있어요."

반면 최 대표는 안 대표가 무단으로 제3자에게 임대를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안 대표에겐 임차 대행권만 있을 뿐 자체적인 운영 권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토지주(건물주)와 임차 계약한 법인 이름으로 임대 업무를 하지 않고 안주영 대표 이름으로 한 게 불법이죠."

"나는 사업가라 돈이 되면 하면 됩니다. 다만 (안 대표가) 자기 이름으로 혼자 수익을 내는 걸 동의할 수 없어요. 임차료를 못 내 이미 명도 소송이 진행 중인데 나가기 전까지 최대한 수익을 창출해야죠." 최 대표가 강조했다.

안 대표는 결국 나가게 되더라도 공간적 대안은 없다고 답했다. "다른 곳에는 이런 공간이 없어요. 코트에는 600년 역사 피맛골과 독립투사들이 묵었던 호해여관, 조선극장 터 등이 있어 자연스럽게 끌려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공간에 초대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공간의 운명에 따라야죠."

전문가들은 코트 사태와 같은 현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예술공간을 시장 질서에만 맡기면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유지하려면 지자체나 기업 등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가 답했다.

김헌식 문화콘텐츠학 박사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애초부터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돈이 될 거라 생각하고 문화복합공간을 만들었다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까 예술가들을 쫓아내는 현상의 대표적 사례로 보여요. 수익이 잘 나면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고 안 됐을 경우 이렇게 철거나 부당한 퇴거 명령이 행해지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지자체는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종로구청 확인 결과 '구청은 절차에 따라서 이행강제금 부과나 해체 신고 접수 등 행정 절차는 행할 수 있지만 임차인간의 분쟁에 끼어들 수는 없다'는 답을 받았다.

또 인사동 특성상 건물이 역사와 분위기에 맞게 운영돼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지만 '서울특별시 문화지구 관리 및 육성에 관한 조례'에 따르면 '백화점 철수 상품 판매 매장'은 권장 업종도 아니지만 제한할 수도 없다. 인사동 '주가로변 지역'에서는 안 되는 업종이지만 코트는 해당 지역에 속하지 않는다.

고려대 김윤태 사회학과 교수는 공공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예술가들이 모인 장소에 '스토리'가 있는 경우 보존되는 게 큰 원칙에서 맞아요. 그러려면 법이나 제도를 통해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 사회가 예술이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의 질이나 정신적인 만족과 행복감에 필수적이라는 걸 인식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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