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정주리 감독 "분노 아닌 절망으로 만들었어요"
[인터뷰]정주리 감독 "분노 아닌 절망으로 만들었어요"
  • 뉴시스
  • 승인 2023.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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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음 소희'로 9년만에 신작 내놔
현장실습 고교생 자살 사건 모티브로
"비극적 죽음 이후 이야기 하려 했다"
"애도 없고 책임도 없는 현실에 절망"
'도희야' 이후 배두나와 또 함께 작업
"배두나 생각하며 써…알아봐줘 감사"
"영화 통해 절망감 헤쳐나오긴 했지만"

 손정빈 기자 = "그 다음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어느 비극적 죽음이 있고난 이후의 이야기요."

영화 '다음 소희'는 소희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제목 그대로 소희 다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2017년 1월 전주 아중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의 실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특성화고에서 현장실습을 나갔던 학생이 콜센터 계약 해지 방어팀에서 일하며 온갖 부당 노동 행위에 시달리던 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만 사건이다. 정주리(43 감독은 이 실화를 '소희'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 그리고 소희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수사하는 경찰 '유진'을 통해 풀어낸다.

2014년 '도희야' 이후 9년만에 나온 새 영화의 소재를 왜 이것으로 선택했느냐고 묻자 정 감독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엔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몇 년 뒤에 알게 됐어요. 일단 알게 된 뒤에는 이 사건이 저를 잡아끌더라고요. 나는 왜 이 일을 몰랐을까, 왜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거리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어요. 제 안의 여러가지 마음들이 혼재한 상태에서 그렇게 이 작품의 전반부 뿐만 아니라 후반부까지 나아가게 된 겁니다."

정 감독이 말한 후반부엔 유진이 소희의 극단적 선택 이면의 일들을 천천히 하나씩 파헤쳐가는 과정이 담겼다. '다음 소희'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명확하게 나누어진 영화다. 전반부는 소희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담겼다면, 후반부엔 앞서 언급한 내용이 담겼다. 그는 "이같은 형식이 반드시 필요했다"며 "이같은 2부 구성으로 영화를 만들 때에야 '다음 소희'가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다음 소희'는 한 소녀의 죽음을 본 관객이 함께 분노하기를 원하는 영화가 아니다. 분노도 분노이지만, 이 애꿎은 죽음이 왜 발생했는지를 철저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아마도 이건 '다음 소희'와 정 감독의 책임감이자 소희가 죽고 난 다음에 남겨진 이들이 마음 속에 반드시 담아야 할 최소한의 윤리로 보인다. "소희 전에도 이런 죽음이 있었을 거예요. 소히 다음에도 있었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했는데, 이 죽음을 제대로 애도한거나 책임 있는 사람들이 반성지 않았습니다. 그 비참한 마음에서 시작한 영화입니다." 정 감독은 "만약 분노하기만 했다면, 이 영화는 전반부에서 끝났을지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정 감독은 분노보다는 절망감을 느꼈고, 이 절망감을 담아내려면 '다음 소희'의 후반부가 필요했다.

정 감독은 후반부 시나리오를 한 배우를 떠올리면서 썼다. 배두나. 배두나는 정 감독의 데뷔작이자 역시 소외된 인간들에 관한 영화였던 '도희야'에 출연했다.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이미 글로벌 스타였던 배두나는 정 감독에게 "'도희야'가 꼭 극장에 걸렸으면 한다"고 말하며 이 작은 영화에, 아직 장편영화 데뷔도 하지 않은 신인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기로 했다. '도희야'를 끝낸 이후 배두나와 일절 연락하지 않고 지냈던 정 감독은 배두나라면 또 한 번 내 영화를 알아봐 줄 거라는 생각에 그에게 '다음 소희' 시나리오를 보냈다. 그는 "1부와 2부로 구성된 영화, 그리고 2부가 매우 중요한 영화를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배두나라는 배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배두나씨를 생각하면서 유진을 그려나갔어요. 배두나씨가 이 역할을 맡을지 맡지 않을지는 물론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배두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유진이라는 인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나서 누구에게 유진을 맡길까, 라고 생각한다면 역시 배두나씨였습니다. 물론 안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엄청 떨렸어요. 시나리오를 메일로 보낸 뒤에 잠을 못잘 정도로요."(웃음)

배두나는 이번에도 정 감독 영화를 하기로 했다. 출연이 확정된 뒤에 정 감독은 배두나를 만났다. 배두나는 정 감독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고 했다. "배두나씨만큼은 제 영화를 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만나서 얘기해보니까, 배두나씨가 이 영화가 왜 이런 형식이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더라고요. 행복했습니다."

정 감독은 '다음 소희' 시나리오 그대로 연출했다. 다시 말해, 어떤 타협도 없이 찍어야 할 장면을 찍어서 완성한 영화다. '도희야' 이후 9년, 두 번째 영화가 나오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건 정 감독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희야'가 개봉 당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은 뒤, 정 감독에게 각종 연출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기존에 있는 시나리오로 연출을 맡아달라는 제안, 기존 시나리오를 일부 각색한 뒤 연출을 맡아달라는 제안 등. 고민했지만, 정 감독은 하지 않았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내가 연출하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배두나는 "타협하지 않고 정도를 걷는 정주리 감독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감독은 "글쎄요, 타협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제가 시나리오를 완성해 놓고 나면 바뀔 여지가 없다는 게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너무 오래 고민해서 쓴 것이니까요. 그게 쉽게 바뀔 리는 없죠."

이 영화는 처음부터 제목이 '다음 소희'였다. 보통의 영화는 가제가 있고, 상황에 따라 제목을 변경하기도 한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제목을 의도적으로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 감독은 '다음 소희'는 '다음 소희'여야 한다고 했다. 일단 제목이 나오면 제목을 수정한다거나 변경하겠다는 생각 없이 끝까지 가게 되는 것이냐고 묻자 정 감독은 "네 맞습니다"라고 답했다.

'다음 소희'는 어두운 이야기이다. 비주류, 아웃사이더들에 관한 영화다. 쉽게 긍정하거나 낙관하지도 않는다. 희망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희망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작품이다. 이런 영화를 내놨기에 정 감독이 그 해소될 수 없는 현실 탓에 여전히 마음 아파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는 "나는 괜찮다"고 했다.

"절망감에서 시작한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완성함으로써 그 절망감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거라고 봐요. 그렇다면 전 복받은 거죠. 제 안에 응축됐던 게 밖으로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이 영화가 지적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분들이 있어요.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라든지, 현장실습 문제를 계속해서 지적하는 노동계에 있는 분들이라든지요. 그들은 여전히 절망감 속에 있습니다. 그분들에 비하면 전 이 영화를 만들어서 다행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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