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플라뇌르
파리의 플라뇌르
  • 강성길 고문(사장, 오션퍼시픽)
  • 승인 2018.08.0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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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뇌르는 프랑스어로 특별한 목적 없이 걷는 사람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기분과 호기심에 따라 발길을 옮기는 산책하는 사람으로 상상해 보면 된다. 천천히 도시를 걸으면서 작고 소소한 것들을 통해 즐거움, 경이로움, 신선함을 즐기는 것이다.

돌아보면 프랑스 이야기는 파리의 유명한 곳들에 대한 답사보다는, 길 위에서 만난 심상의 기록이다. 루브르에서 본 수많은 회화보다 창문의 하얀 레이스 커튼과 제라늄 화분, 오래된 석조 건물의 이끼와 마로니에 나무, 카페의 풍경과 작은 광장들, 길을 가다 문득 들려오는 교회의 종소리 , 광활한 하늘에 퍼져있던 새털구름, 이런 것들이 더의미 있는 즐거움이었다. 샹각해 보면 나도 파리의 플라뇌르였다. 

누군가의 익명으로 테이블마다 와인을 돌렸다. 순간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도 잠시, 그 익명성이 주는 즐거움이 전해졌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뭔가를 깜짝 도모하는 일, 그 즉흥성과 가식 없는 마음을 담아 건배를 해야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지면 알고 모르면 그뿐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던져지는 그익명이 어쩌면 여행의 본질인지 모른다. 익명은 비밀스러움과 호기심 그것만으로 즐겁다. 

또 어딜 가든 아는 것만큼 보이지만, 우린지금이 기회다 싶으면 별 아는 것 없이 떠난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지리에 밝은 것도 아니다. 불편한 약점이 많지만, 우리의 장점은 완벽해서 떠나지 못하는 쪽보다 ‘한번 해보지’하는 마음으로 그냥 간다.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를 즉흥성이 있다는 건 아직 젊다는 증거가 아닐까?

플라뇌르, 그들은 친절하고 여유가 있다. 줄을 서서 아무리 기다려도 조급해 보이지 않는다. 그냥 기다리다 자기 차례가 오면 천천히 자기 볼일을 보면서,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여유가 참 부럽다. 

니스 백사장은 모래가 아닌 자갈밭이다. 죄다 납작한 돌이 해변을 덮고 있다. 오후8시의 니스는 햇살은 사라지고, 바다의 물살은 살에 닿지 않아도 을씨년스럽다. 플라뇌르의 자유로움은 자신을 구속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자연스러움과 당당함 저 이면에는 자신의 단단한 자아가 숨어있지 않을까.

운명과 숙명,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살고 싶은 나라를 선택할 수 없다. 이렇게 정해진 것을 숙명이라 한다면, 운명은 자신의 의지대로 바꿔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 프랑스 여행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물어오면, 여행의 호흡이 다시 살아나 두서없이 주절댄다. 프랑스는 파리의 화려하고 유명한 명소 때문에 오히려 여러 도시의 이미지가 한정되어 버린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그들의 엄청난 유물과 유적들은 현재의 삶과 겉돌지 않는다. 겐지즈 강의 비현실적인 느낌도 아니고, 피라미드 같은 괴리감도 없다. 그들이 가진 유산에 긍지를 가지지만 조상덕이라는 무게에 짓눌려있지 않다. 역사가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은 프랑스가 가진 또다른 매력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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